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량 해전 (문단 편집) ===# 노량해전 무용론과 반박 #=== [[산케이 신문]]의 서울 특파원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미 전투 의지를 잃은 적을 기어코 추격하다 전사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순신을 떠받드냐고 비판한 바 있다. 반론하자면 노량 해전 무용론은 당시 사정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 '''멀쩡히 잘 지내고 있던''' 조선을 명나라로 들어갈 길을 안 빌려줬다는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침공한 것이 일본이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명분이 중요한데 이것은 명분이랄 것도 안 된다. 무엇보다 대의명분을 중요시 여기는 유교권 문화일수록 더더욱.]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국력상 보복하러 쳐들어 갈 수도 없으니 이들을 섬멸하는 것만이 7년 전란에 대한 일본을 징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명이 일본에 대한 반격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이미 명백히 밝힌 상황인 데다 전후 도요토미 가문도 몰락했고 새로 권력을 잡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기간 내내 전쟁에 불참하는 등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도요토미 사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을 대신하여 에도에 막부를 개설하여 쇼군에 취임한 이후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고 성의 표시 차원에서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 일부를 송환했다. 다만 막부 정권의 특성상 이미 전쟁을 위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한 다이묘들에게 이 이상 전쟁 책임을 강제할 수단이 없었고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다이묘들도 전쟁이 끝나고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편을 바꾼 상태였다. 물론 이에야스 입장에서도 이 역시 최대한 할 만큼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종전과 퇴각은 엄연히 다르다. '''노량해전 당시 그 뒤 일본이 조선 땅을 완전히 떠난 후에도 몇 년간 조선, 일본, 명나라의 정부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아직 끝난 전쟁이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결과적으로 일본이 전쟁을 포기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당장 조선 측이 알 리 없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으면 전대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재개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내전에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임자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후대의 눈으로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었고 그에게 조선과의 전쟁을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의 누가 그런 미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정식으로 끝난 것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정식으로 종전을 위한 국서가 오고 협상한 뒤인 광해군 1년인 1609년 [[기유약조]]를 맺은 후'''이고, 그 사이 약 10여 년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휴전조차 아닌 대치 상태에 가까웠다. 철군 약속은 명나라 장수들이 뇌물이나 개인적 이유로 불법 합의해준 거지 조선이나 명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은 [[사로병진책]]이라는 초대형 포위섬멸 작전을 진행해 일본군을 섬멸시키는 중이었고 노량해전도 이 작전의 한 부분이었다. 실제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대해 일절 침략할 생각이 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골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빠돌이]]인지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을 경우 진짜 큰일날 수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주인님]]이 해보지 못한 것을 이뤄 드리려고 도전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시다, 고니시를 비롯한 문치파는 대부분 조선 침략에 반대하는 세력이었으므로 이들이 권력을 잡았어도 재침공을 시도할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조선 침략에 찬성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동군 소속이었던 관계로 해당 대체역사에서는 오히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약소 다이묘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치파 또한 본인들의 의도와 별개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조선에 피해를 준 건 사실인지라 조선과 일본의 관계 개선은 확실히 실제 역사보다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며, 오히려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 위해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 사신단이 조선 정부에 의해 모조리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훗날 국력을 회복한 조선이 임진왜란의 복수를 위해 일본을 침공하여 수많은 사무라이들을 학살하는 등의 불상사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애초에 실제 역사에서 에도 막부가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한 것도 에도 막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도쿠가와 가문 사람들이 임진왜란에 불참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도쿠가와 막부도 조선과의 화친과정에서 이 점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설령 [[현실은 시궁창|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끝내 재침공에 실패했다 해도 조선과 일본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건 그로부터 더욱 먼 미래에나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서게 되면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이 조선과 명을 압박해 오기 시작하는데, 만일 왜군이 노량 해전을 치르지 않고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으로 퇴각했다면 조선으로서는 자칫 북으로는 만주족, 남으로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야 하는 골때리는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정유재란|조선 측 입장에서 일본의 철군은 종전 이후 철군이 아닌 전략적 후퇴에 가까웠고 이렇게 후퇴한 대규모 병력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를 상황이었다.]] [[구로다 가쓰히로]]의 말대로 후퇴하는 적을 고이 보내주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하고 미래의 위험을 만들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현대전을 포함해 '''모든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고 퇴각이나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문제될 거 없다.''' 현대에 와서도 노량 해전처럼 [[스탈린그라드 전투|후퇴하는 적을]] [[팔레즈 포위전|얼마나 잘 섬멸시키는지]], 반대로 [[됭케르크 철수작전|후퇴하는 측은]] [[마켓 가든 작전|얼마나 적은 피해로]] [[흥남 철수작전|잘 후퇴하는지]]의 여부가 전쟁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괜히 전쟁 전술에 추격전술과 퇴각전술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송양공]]의 사례처럼 고이 보내주는 게 호구짓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명연합수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어 향후 전쟁 의지를 꺾어야 했고, 그래서 노량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군이 입는 피해의 정도와 무관하게 단순히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게 목표였던 이전 전투와 달리 왜군을 최대한 섬멸하는 게 목표였을 것이고, 야간전이라 평소보다 근접전을 펼쳤기 때문에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물론 판옥선 자체가 일본군이 올라가기에는 너무나도 큰 군함이었을뿐더러 조선군의 근접전 능력이 임진왜란 초기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상황이었으므로, 그만큼 일본군 병사들 또한 근접전에서 많이 전사하였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는 일본군은 전략적 후퇴가 아닌 완전 철군을 했고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가문이 망한 뒤 흥한 도쿠가와 가문은 다시 재전쟁을 할 마음이 없었고 그리고 진짜 그랬다는 것을 아는 '''현대인''' 관점에서나 노량 해전이 불필요했다 평가할 수 있는 것이지, 당대에는 노량 해전은 필수불가결적이었다. 더군다나 일본군 측은 항복/강화/철군과 관련된 그 어떤 공식 문서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조명연합군 측은 일본군을 믿고 싶었다 한들 일본군을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군은 그럴 보증이 하나도 없었고 보증 없이 믿었다고 뒷통수 당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노량해전이 없었더라면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장병들이 더이상 죽진 않았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사실 [[임진왜란]] 문서에 적혀 있는 일본의 내부 사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 내 유력 [[다이묘]]들은 조선 침략에 소극적이었으며, 어쨌든 당시 일본 1인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으니 형식적으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가 얼마 안 돼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가 대다수였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과 일본의 상황을 보면, 나라가 한 번 뒤집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과는 달리 일본 측은 전력을 소모하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임진왜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손쉽게 재건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에도 막부]]의 쇼군이 됐으니 가능했던 것이지, 만약 노량 해전에서 친 도요토미 세력을 대량으로 섬멸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도요토미파의 세력이 조금이라도 더 강성한 상태였다면 일본 내 세력 구도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자체가 도요토미 파에게 유리한 구도였는데, 연속된 배신과 도요토미 파의 실질적인 수장인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품 부족으로 도쿠가와 파가 이긴 전투였다. 만약 도요토미 측이 노량 해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통제력이 더 강했다면 어찌 될 지 모를 일이었다. 당장 노량 해전에서 대판 깨진 [[시마즈 요시히로]]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편에 섰다. 데리고 간 군사가 적어서 적극적으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았지만...(이 역시 시마즈 가문이 노량 해전에서 피해를 입지 않아 군사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이 가능한 부분이다.) 해당 대체역사에서는 변수에 따라 일본이 제2의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를 맞이하거나(서일본의 도요토미 정권과 동일본의 도쿠가와 정권으로 분열) 아예 도요토미 정권의 일본 통일이 실제 역사의 에도 막부처럼 19세기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이 처절하게 갈려버린 노량 해전, 더 나아가 임진왜란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